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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장인 리더십-4회말] 말괄량이 길들이기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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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도 되기 전부터 시작된 감독 생활이 이제 어언 40년에 다다른다. 그만큼 숱하게 많은 선수들의 그의 손을 거쳐갔다.

가지많은 나무엔 바람 잘 날 없다는 것이 인생의 이치. 김성근 감독에게도 속을 무던히도 썩였던 선수들이 많았다. 그러나 김 감독은 그런 선수들도 쉽게 내치지 않았다. 물론 그도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선수가 포기하기 전까진 절대 그의 마음을 닫지 않았다.

한국시리즈 우승후 맥주파티를 하는 김성근 감독

시즌 중 KIA 김진우가 잠적을 감췄을 때 김 감독은 매우 안타까워 했다. 한국야구사를 다시 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는 선수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야구를 그만둔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당시 “가능하다면 내가 한번 만나보고 싶어. KIA에서도 애를 써 봤겠지만 말야.”라고 말했다.

만난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던 걸까.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시리즈 ‘1회초’에 언급했듯이 선수들의 정신무장을 새롭게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는 김 감독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의 답은 의외였다. “말을 해주긴 뭔 말을 해. 그냥 들어주는거지. 만나게 되면 한 일주일동안 내내 술을 같이 먹어줄 생각이야. 말 하고 싶으면 하게 하고 하기 싫으면 술만 먹고. 도망가는 사람은 외로워서 그런 경우가 많거든.”

그동안 말썽쟁이 선수들을 가르치며 얻은 노하우에서 나온 말이다. 리더야 말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선 안되기 때문이다. 그는 리더가 먼저 마음을 닫으면 진심으로 혼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실린 ‘응징’이 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김 감독은 “기본적으로 야구 선수들은 착해. 말썽피는 애들이 오히려 여린 경우가 많아. 진짜 걱정해주면서 얘기를 들어주면 순한 양이 된다고”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태평양 감독 시절 정명원(현 현대 코치)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야구선수 중 착한 걸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고운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너무 착한 것이 문제였다. 하루는 고된 훈련을 참지 못하고 도망가겠다는 친구를 따라 숙소를 이탈한 적이 있었다. 결국 며칠만에 잡혀왔고 김 감독의 집을 찾아와 고개를 숙였다. 이전에도 몇차례 비슷한 일들이 있었던 터다. 

김 감독은 말 없이 집을 나섰다. 그 뒤엔 정명원이 머쓱한 표정과 걸음걸이로 따라오고 있었다. 한참을 걷는 동안 아무도 말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김 감독이 불쑥 동네 문방구로 들어갔다. 김 감독은 일기장과 볼펜 몇자루를 사더니 정명원에게 건넸다. 왜 주는지 뭘 하라는 건지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또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번엔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정명원도 역시 따라 들어갔다. 맥주 몇병을 주문하더니 또 말이 없다. 잔에 술을 부어주고 “마셔”가 전부였다.

잔이 비면 술을 다시 따라줄 뿐 김 감독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정명원은 어색하게 계속 술만 들이켜야 했다. 시킨 술이 다 떨어질 때 쯤 김 감독이 드디어 하고픈 얘기를 꺼냈다.

“너 오늘부터 이 일기장에 매일 네가 하고 싶은 얘기를 써. 너한테 야구가 뭔지, 왜 야구를 하는지도 쓰고 훈련이 어땠는지도 써 봐. 가끔씩 내가 읽어줄테니까.”

그걸로 끝이었다. 한바탕 크게 혼날 것을 각오했던 정명원은 한참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이내 김 감독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이후 정명원은 매일같이 일기장을 써내려갔고 김 감독과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물론 그 이후 정명원은 단 한번도 사고를 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한국시리즈 첫 노히트 노런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대투수로 성장했다.

해태(현 KIA) 2군 감독시절엔 임창용이라는 투수를 만났다. 그 역시 아주 빼어난 자질을 갖고 있었다. 김 감독은 욕심이 났다.

하지만 임창용은 좀처럼 그물 속에 들어와주질 않았다. 지각은 다반사였고 걸핏하면 훈련을 빼먹었다. 김 감독은 정명원과는 다른, 그러나 결국에 원하는 바는 같은 전략(?)을 썼다.

그리고 기다리던(?)그 날이 왔다. 임창용은 3일간 무단으로 팀을 이탈했다가 슬쩍 다시 돌아왔다. 김 감독은 곧바로 소리쳤다. “너 뭐하는 놈이야. 필요없으니 당장 나가.”

임창용은 깜짝 놀랐다. 지금껏 자신에게 그처럼 심하게 대하는 감독은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150km에 육박하는 무시무시한 직구를 사이드암으로 던지는 유망주를 다짜고짜 혼낸다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진짜 야구를 그만두면 큰 낭패이기 때문이다.

임창용은 몸이 달았다. 훈련이 끝난 뒤 김 감독의 숙소를 찾아가 방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김 감독은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기를 세시간 여. 김 감독은 그제서야 임창용을 불러들였다.

방에 마주 앉아서는 따뜻하게 말을 건넸다. ‘그가 얼마나 좋은 투수인지, 열심히 하면 얼마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지’를 얘기해주며 자상하게 타일렀다. 이후 임창용은 훈련에 매진했고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한 투수로 성장했다.

김 감독은 “그때 임창용이가 오래 안 기다리고 가 버리면 어떻하나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며 너털웃음으로 당시를 회상했다.

말썽쟁이들을 대하는 김 감독의 노하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는 ‘믿음’이라는 또 하나의 카드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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