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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장인 리더십-4회초] 참기 힘들수록 냉정하게 감독의 신일고 감독 시절 모습SK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다음날. EBS 라디오에서 ‘세계 음악기행’을 진행하는 성기완씨는 김성근 감독과 연관이 있는 자신의 중학생 시절 경험담을 얘기했다고 한다. 방송을 들은 팬이 한 야구 게시판에 올린 글에 따르면 성기완씨는 자신의 충암중 선배(당시 충암고 야구선수)로부터 “김 감독이 훈련 중 한 선수의 배트에 입을 맞고 쓰러졌다. 앞니가 다 빠질정도의 충격이었지만 김 감독은 선수를 혼내지 않고 “네 스윙 궤적 안에 들어가 있던 내 잘못”이라고 위로하더라”는 말을 듣고 그때부터 야구의 신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성기완씨의 기억은 정확하다. 실제로 김 감독의 앞니는 모두 틀니다. 당시는 충암고가 황금사자기 8강전서 신일고에 패해 와신상담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김 ..
[김성근 장인 리더십-3회말] 같은 실패는 반복하지 않는다 충암고 선수들이 77년 봉황기 우승을 차지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포수 장비를 하고 있는 선수가 조범현 KIA 감독김성근 감독은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40여년의 감독 생활 중 운동장에서 울어본 것은 딱 두 번. 충암고 감독시절이던 1977년 황금사자기 8강전서 신일고에 패했을 때,그리고 2002년 한국시리즈서 6차전 삼성에 역전패를 당하고는 굵은 눈물을 흘렸다. 김 감독은 아직도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가끔씩 “그때 조범현(KIA 감독. 당시 주전 포수)이 마스크로 땅을 치며 “이제 우리 대학 우찌 가노,우찌 가노”하며 우는 걸 보니 마음이 무너지더라” , “이동현이가 6차전 던지고는 탈진으로 쓰러져 라커에 누워 있었어. 9회 역전을 당하고 갑자기 서럽게 우는데 어찌나 미안하던지”라며..
[김성근 장인 리더십-3회초] 즐기는 리더의 힘 김성근 감독은 재일교포 2세다.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거기서 마쳤다. 그리고 그는 찢어지게 가난했다. 단 두 줄의 사실만으로 가설이 줄을 잇는다. 김성근 감독의 가쓰라고교 졸업사진. 맨 뒷줄 가장 큰 학생이 김성근 감독.“김 감독은 일본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이기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그때부터 독기를 품고 이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김 감독은 이 같은 가설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초등학교 때는 그런 일이 좀 있었다. 하지만 이후엔 글쎄...” 초등학교 시절 김 감독은 주위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10여명에게 둘러 쌓여 두들겨 맞은 적도 있다. 그러나 6학년때 학교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던 학생과 1대1로 맞붙어 이긴 뒤론 맘 편히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중학..
[김성근 장인 리더십-2회말] KS 발야구 공포증 극복기 2007년 김성근 감독에게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은 ‘두산’이었다. 두산은 결국 마지막 승자로 남아 SK와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놓고 마지막 승부를 펼쳤다.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가장 큰 고민은 두산의 ‘발’이었다. 김동주를 축으로 한 중심타선의 힘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그건 두 번째 문제였다. 2002년 한국시리즈서 삼성 이승엽을 철저하게 막아낸 예에서 알 수 있듯, 단기전서 타자를 막는 방법에 대해선 나름의 노하우가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승엽에게도 마지막 순간,결정적 홈런을 맞았고 당시 4번 마해영을 봉쇄하는데는 실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승부는 조금 미뤄둘 수 있었다. 발은 달랐다. 전혀 차원이 다른 공격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두산의 발은 상식을 뛰어넘는 질주라는 점..
[김성근 장인 리더십-2회초] 두려움의 미학 김성근 감독은 겁이 많다. 특히 야구에 대해 그렇다. ‘야구에선 겁쟁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수준이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은 늘 까맣게 타 있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무너진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김 감독은 새로운 팀을 맡거나 새로운 시즌이 시작할때면 언제나 “큰일났다”고 말한다. 그는 지난 2002년 LG 정식 감독에 취임했을 때도, SK를 맡은 뒤에도 “부족한 것이 너무 많다”고 했다. 당시 주위에선 “제자(조범현 현 KIA 감독)가 맡았던 팀인데 그런 식으로 표현하면 조 감독이 뭐가 되냐”고 수근거렸다. 김 감독은 진심이었다.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그의 한 측근은 “첫 훈련이던 제주 캠프가 시작되고 며김 감독은 진심이었다.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그의 한 측근은 “첫 훈련이던 제주..
[김성근 장인 리더십-1회말] 모자람을 감추려하지 말라 사람들은 김성근 감독을 ‘야구의 신’이라고 부른다. 2002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상대 감독이었던 김응룡 당시 삼성 감독이 “마치 ‘야구의 신’과 싸운 것 같다”고 한데서 시작된 호칭이다. 그러나 정작 김 감독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젔는다. “야구는 인생과 같아서 끝을 알 수 없다. 계속 배워야한다”이라는 것이 ‘야구의 신’에 대한 그의 반응이다. 괜한 겸양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야구를 더 알고 싶어한다. 엄청난 독서량도 그 때문이다. 그의 집엔 엄청난 양의 야구 관련 서적이 빼곡히 정리돼 있다. 스스로도 “수백권이 넘는 건 맞는데 다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고 할 정도다. 그의 야구를 무조건 ‘일본식’으로 단정하기 힘든 이유도 여기 있다. 솔직히 그의 야구와 메이저리그식은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
[김성근 장인 리더십-1회초] '어떻게'가 아니라 '왜'부터 김성근 감독은 혹독한 훈련으로 유명하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한다. 12시쯤 식사가 차려지지만 언제 먹으란 소리가 없다. 김 감독이 맡은 팀이 스프링 캠프를 떠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기사가 바로 “선수들이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도 잊을 정도”다. 그러나 김 감독이 아끼지 않는 시간이 있다. 매일 저녁 식사 후 1시간 씩 치러지는 미팅이 그것이다. 휴식일 전날을 빼곤 매일같이 일종의 정신교육이 이루어 진다. 오키나와 전지훈련 첫날 양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훈련을 지도하는 모습 명 투수 출신 한 해설위원은 이를 두고 “프로 선수들에게 그런 교육을 시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꼬집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비난은 미팅의 효과를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나온 것이다. 김 감독은 그 시간을 통해 ‘어떻게’가 아..
[박동희의 야구탐사] ‘슬픈 전설’, 재일동포 야구단 [4]편 1994년 봉황대기대회에 참가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1990년대 동포팀 가운데 가장 전력이 좋았던 팀이다. 한재우 단장(사진 뒷줄 맨 왼쪽)과 아라이 다카히로(한국명 박귀홍, 뒷줄 맨 오른쪽)가 보인다(사진=스포츠춘추) 야구는 기록과 역사의 스포츠다. 1964년 9월 25일 대통령배 실업리그에서 김영덕(대한해운공사)이 기록한 퍼펙트게임을 4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할아버지와 손자가 공통화제로 삼을 수 있는 건 야구가 지닌 역사성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슬픈 전설이 있다. 재일동포 야구단이다. 한국전쟁으로 정체를 거듭하던 국내야구계에 새로운 야구이론과 기술을 전수하던 재일동포 야구단은 1997년을 끝으로 야구연감에서 사라졌다. 장훈, 김성근, 배수찬, 김박성, 황진환, 박귀홍 등..
[박동희의 야구탐사] ‘슬픈 전설’, 재일동포 야구단 [3]편 1959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에 이어 동포 성인야구단이 초청돼 국내 실업팀과 친선경기를 벌였다. 사진은 동포 성인야구단의 일원으로 온 한 선수가 서울운동장 앞에서 학생들에게 사인을 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제 동포 야구단도 서울운동장도 역사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야구는 기록과 역사의 스포츠다. 1964년 9월 25일 대통령배 실업리그에서 김영덕(대한해운공사)이 기록한 퍼펙트게임을 4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할아버지와 손자가 공통화제로 삼을 수 있는 건 야구가 지닌 역사성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슬픈 전설이 있다. 재일동포 야구단이다. 한국전쟁으로 정체를 거듭하던 국내야구계에 새로운 야구이론과 기술을 전수하던 재일동포 야구단은 1997년을 끝으로 야구연감에서 사라졌다. 장훈, 김성..
[박동희의 야구탐사] ‘슬픈 전설’, 재일동포 야구단 [2]편 1986년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가 마련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환영회에서 선수단과 관계자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 사진 윗줄 맨 왼쪽이 한재우 감독이며, 아랫줄 가운데 이가 김박성이다(사진=스포츠춘추) 야구는 기록과 역사의 스포츠다. 1964년 9월 25일 대통령배 실업리그에서 김영덕(대한해운공사)이 기록한 퍼펙트게임을 4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할아버지와 손자가 공통화제로 삼을 수 있는 건 야구가 지닌 역사성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슬픈 전설이 있다. 재일동포 야구단이다. 한국전쟁으로 정체를 거듭하던 국내야구계에 새로운 야구이론과 기술을 전수하던 재일동포 야구단은 1997년을 끝으로 야구연감에서 사라졌다. 장훈, 김성근, 배수찬, 김박성, 황진환, 박귀홍 등 훗날 한·일 야구..
[박동희의 야구탐사] ‘슬픈 전설’, 재일동포 야구단 [1]편 1955년부터 1997년까지 해마다 여름이면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이 한국을 방문해 친선경기를 가졌다. 재일동포 야구인들에겐 조국을 발견하는 기회였고 한국야구로선 선진야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야구는 기록과 역사의 스포츠다. 1964년 9월 25일 대통령배 실업리그에서 김영덕(대한해운공사)이 기록한 퍼펙트게임을 4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할아버지와 손자가 공통화제로 삼을 수 있는 건 야구가 지닌 역사성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슬픈 전설이 있다. 재일동포 야구단이다. 한국전쟁으로 정체를 거듭하던 국내야구계에 새로운 야구이론과 기술을 전수하던 재일동포 야구단은 1997년을 끝으로 야구연감에서..
불타는 그라운드 30 (최종회)
불타는 그라운드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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